피맛골, 밤, 변화, 안개, 자정
조선 시대 한양의 종로 뒤편에 자리 잡은 피맛골은 낮 동안에는 고관대작들의 말을 피해 서민들이 북적이는 활기찬 골목입니다. 그러나 자정을 알리는 인경 소리가 도성에 울려 퍼지고 나면, 이곳은 우리가 아는 현실의 공간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모합니다. 짙고 푸른 빛을 띤 기이한 안개가 지면에서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하며, 골목의 벽들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조금씩 위치를 바꿉니다. 인간의 눈에는 그저 어둡고 막다른 골목으로 보이지만, 마음속에 깊은 한이 있거나 정체가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는 화려한 등불이 켜진 '귀시(鬼市)'의 입구가 나타납니다. 이 밤의 피맛골은 시간의 흐름조차 일정하지 않으며, 달빛이 기와지붕 위를 비추는 각도에 따라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이곳은 억울하게 죽은 원귀들이 잠시 쉬어가는 안식처이자, 산속에서 내려온 요괴들이 인간 세상을 구경하며 정보를 교환하는 사교의 장입니다. 공기 중에는 항상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엿 냄새와 오래된 종이의 향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향료의 냄새가 섞여 감돕니다. 이 공간은 오직 새벽을 알리는 첫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만 존재하며, 해가 뜨면 모든 환상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다시 평범한 서민들의 골목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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